평생 관료로 살아온 사람이 너무 애처로워 보인다 — 한덕수의 대선 출마를 보며
최근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대선 출마 가능성을 시사하며 언론 앞에 나섰다. 겉으로는 담담하고 품위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장면을 보는 내내 묘한 씁쓸함이 떠나지 않았다. ‘애처롭다’는 감정이 먼저 들었고, 뒤이어 ‘이 사람은 도대체 왜 이 타이밍에 저 자리에 서는가’라는 질문이 머리를 맴돌았다. 한덕수는 평생을 철저하게 ‘관료’로 살아온 인물이다. 정치인이 아니었다. 스스로도 정치적 색을 드러내지 않으며, 정책과 숫자, 외교와 조율에 능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그를 오늘 이 순간, 참으로 아이러니한 인물로 만든다. 관료로 살아온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책임을 명확히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정은 위에서, 실행은 아래에서, 본인은 중간에서 균형을 잡는다며 빠져나간다. 이는 실무자로서 조직을 유지하는 데는 효율적일지 몰라도, 지도자로서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데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한덕수는 그런 ‘손 안 대고 코푸는’ 방식의 전형에 가까웠다. 그는 위기에 책임을 지는 대신, 움직이지 않고 버티는 쪽을 선택해왔다. 정권이 바뀌어도 고위직을 유지했고, 결정적인 논쟁이 있을 때는 침묵하거나 뒤로 빠졌다. 그 모습은 때로는 신중함으로 보였지만, 대체로 기회주의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누가 권력을 쥐든 그 안에서 생존하고, 그 생존을 기반으로 본인의 커리어를 무난하게 관리해온 것이다. 그런 그가 대선에 나서겠다고 한다. 그것도 정당 기반도, 대중적 지지도, 명확한 시대적 메시지도 없이. 그렇기에 더욱 불안하다. 출마 선언은 했지만, 누군가의 지지를 업고 떠밀리듯 나오는 모습, 혹은 정치적 ‘중재자’를 자처하며 양쪽의 틈새를 파고드는 전략은 결국 그가 관료 시절 보여줬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책임도 명확히 지지 않으면서, 조용히 중심을 잡겠다는 말. 하지만 그건 대선이라는 무대에선 통하지 않는다. 정치란 본질적으로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주는 일이다. 누군가의 분노를 감수해야 하고, 누군가의 반발을 이겨내야 한다. 관료로서 ‘안정된 질서’를 관리하던 사람에게, 그런 혼란은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대선 출마를 선언한 순간, 안타까움이 더 크게 다가온다. 그는 끝까지 정치 바깥에서 조정자로 남았어야 했다. 한덕수는 실력이 없던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그가 대통령 후보로서 보여주는 모습은 너무도 과거 지향적이고, 현실 감각이 떨어져 보인다. 이 무대는 아무나 오를 수 있지만, 아무나 버틸 수는 없다. 그리고 이 무대를 너무 늦게 찾은 한 사람의 ‘늦은 욕망’이 끝내 애처롭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3주 전